맥스웰의 악마
열역학 제2법칙은 쉽게 말해서 뜨거운 공기를 담은 상자 A와 차가운 공기를 담은 상자 B를 연결하면 서로 온도가 비슷해진다(열평형 상태)는 것인데, 이 도깨비는 두 상자의 가운데 연결통로에 있으면서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특정 분자를 지나가게 하거나 못 지나가게 한다. 그 기준이란,
A에서 B로 지나가려는 공기분자 중에서는 느린(차가운) 분자만 통과시킨다.
B에서 A로 지나가려는 공기분자 중에서는 빠른(뜨거운) 분자만 통과시킨다.
이렇게 되면 온도가 비슷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A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B는 점점 더 차가워지게 된다. 즉, 엔트로피가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맥스웰의 악마
W.Poundstone,
The Recursive Universe,chap.3,"Maxwell's Demon"
우주의 복잡성의 기원에 관한 현재의 논의들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정보이론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그 이론이 나오게 되는 역사를 검토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정보이론을 낳은 것은 영구운동기관의 불가능성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반박하는 것으로 맥스웰에 의해서 제시된 가상적 존재로서 "맥스웰의 악마"(Maxwell's Demon)가 있다. 여기서 부터 논의를 풀어 나가도록 하자.
맥스웰(J.C.Maxwell)은 전기장과 자기장 둘 다에 적용되는 일련의 방정식을 발견한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원자를 실재하는 것으로 본 최초의 물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71년에 그는 <열의 이론>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거기에 짧은 글이 하나 들어있는데 거기서 그는 "분자들의 운동의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가상적 존재"에 의해서 작동되는 장치를 다루고 있다. 그 장치가 바로 영구운동기관이다. 그 악마는 대기로 부터도 유용한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다. 1871년 당시 물리학에 정통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맥스웰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맥스웰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당시의 통설에 도발하고 있다. 이 장치에 어디가 잘 못되었는가?
명석한 존재에 맥스웰의 악마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이 수수께끼는 너무 도발적이었다. 이 파라독스는 근 반세기 동안 해명되지 못한 채 있었다. 오늘날도 이것은 가끔 과학논문의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맥스웰의 본래 논의를 약간 단순화시킨 형태로서 이 논의를 시작하자. 논의를 위한 사전 지식으로 무로 부터 에너지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유념하고 있으면 된다.
밀폐된 용기가 상,하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칸막이에 작은 쪽문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공기분자 보다 약간 큰 정도로 아주 작다. 맥스웰의 악마는 이 문을 열고,닫는다. 아래 칸의 분자가 문으로 접근해 올 때는 악마는 언제나 그 문을 열고 그 분자를 윗칸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윗칸의 분자가 접근해 오면 문을 잠근채로 둔다. 아래칸의 분자는 윗칸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일단 윗칸으로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맥스웰의 악마는 모든 공기분자를 윗칸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아랫칸은 진공상태가 될 것이고 윗칸은 정상기압의 두배가 될 것이다. 그 다음 악마는 윗칸과 아랫칸을 연결시키는 U자형 파이프를 부착한다. 그 파이프에 터빈이 부착되어 있다. 강한 바람이 파이프를 통해서 불 것이고 그것이 터빈의 날개를 돌린다.(물론 압력이 같아질 때 까지이다) 이 터빈으로 곡식을 빻을 수도 있을 것이고,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을 것이며, 기타 악마가 원하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에너지는 어디로 부터 나왔는가?
맥스웰의 악마는 많은 물리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는데 왜냐하면 이 파라독스가 열역학 제1,2법칙을 의심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이 두 법칙 다 1850년 독일의 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R.Clausius)에 의해서 정식화되었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에너지가 역학적인 일로 전환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의 연구 방식은 물리학자의 분위기 만큼이나 공학자의 분위기를 풍긴다. 공학적 방식에서 열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관심사가 아닌데 클라우지우스도 열의 본성을 깊이 탐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예컨대 증기기관의 설계자가 에너지를 어떤 형태에서 어떤 다른 형태로 전환시킬 때 부딪히는 몇가지 제약들을 정식화할려고 했다.
에너지는 여러가지 형태들을 가질 수 있으며 자연적 과정이나 인공적 장치를 통해서 그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잘 확립되어 있었다. 불은 화학적 에너지를 열로 전환시키고,증기엔진은 열을 일로 전환시킨다.
똑같이 열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 처럼 보이는 많은 과정들이 있다. 댐의 꼭대기에 있는 물은 중력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것이 낙하하면서 방앗간에 동력을 공급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수차가 없다면 물은 바로 떨어져서 에너지는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클라우지우스의 최초의 위대한 통찰은 에너지는 실제로 소멸하지 않으며 우주의 총에너지는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었다. 이 일반화가 열역학 제 1법칙이 되었다.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단지 형태가 변화되었을 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에너지는 항상 거기에 있다고 클라우지우스는 주장했다.
많은 경우 잃어버린 에너지는 열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이 댐에서 낙하함에 따라 중력에너지는 운동에너지로 바뀌고 다시 그것은 열에너지로 바뀐다. 댐의 바닥에 있는 물은 위에 있는 물보다 약간 온도가 높다. 물이 수차를 돌린다면 그 속도가 약간 느려질 것이다. 이 경우 바로 떨어진 물보다 온도가 약간 낮은데 그것은 물의 에너지의 일부가 역학적 일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열역학 제 1법칙은 또한 에너지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클라우지우스는 우리가 진정한 영구운동기관을 만드는데 실패해온 것은 설계의 문제가 아니고, 자연의 근본적 제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천재성도 이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 (영구운동기관이라는 용어는 오해하기 쉽다. 마찰이 없는 상태에서는 영구운동은 가능하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거의 영구히 돌고 있다. 여기서의 영구운동기관이란 이것과는 달리 에너지를 스스로 창출하는 기관이다.)
클라우지우스는 에너지의 전환에 제 1법칙의 상한과 하한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열은 에너지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 특이한 신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상 여타의 에너지를 열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반대는 어려우며 가끔은 불가능하다.
클라우지우스는 프랑스의 기술자였던 카르노(S.Carnot)의 연구를 이 논의에 끌여 들였다. 1824년 카르노는 열은 온도차가 있을 때만 역학적 일로 바꿀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바깥과 온도차가 없으면 증기엔진은 한방울의 열에너지도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 없다.
클라우지우스는 카르노가 발견한 사항은 열역학 제 1법칙 만큼이나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1법칙은 실제로 결코 일어나지 않는 많은 과정들을 허용한다. 물이 위로 흘러 차가와 지는 현상은 있을 법 하지 않지만 제 1법칙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중력에너지와 운동에너지로 물이 얻은 에너지는 상실한 열에너지에 의해서 정확히 상쇄되고 있음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허용하는한 에너지 전환에 관한 어떠한 이론도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실제 온도차는 소멸되어 균등해 지려는 경향이 있다. 온도차는 외부의 개입없이는 결코 증가하지 않는다. 이 일반화를 정량화하기 위해서 클라우지우스는 새로운 수학적 양을 도입했다. 그는 이 양을 "verwandlungsinhalt"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변형량"(transformation content)을 의미한다. 후에 그는 이것을 "전화되는"을 의미하는 희랍어 "엔트로피"(entropy)라는 용어로 정착시켰다.
클라우지우스의 엔트로피는 물체속에 내재하는 추상적 양이다. 열이 물체속에 유입되거나 빠져나갈 때 그것의 엔트로피 또한 변한다. 엔트로피 변화는 물체에 유입되는 열량을 그것의 온도로 나눈 양으로 정의된다.
클라우지우스는 그의 열역학 제 2법칙을 간명하게 진술하기 위해서 엔트로피의 개념이 필요했다. 즉 2법칙은 닫힌 계에서의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로 표현된다. 붙어있는 두개의 저장고 -하나는 고온부,다른 하나는 저온부- 로 된 닫힌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열은 고온부의 물로 부터 저온부의 물로 흐른다. 열역학 제 1법칙은 고온부의 물의 열손실이 저온부의 물의 열획득과 일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온부의 물은 또한 엔트로피가 줄어들 것이다. 엔트로피의 감소는 이전된 열량을 고온부의 물의 온도로 나눈 값이다.
저온부의 물은 엔트로피를 획득한다. 그것이 획득한 엔트로피량은 획득한 열량을 저온부의 온도로 나눈 것이다. 비록 획득한 열량은 다른 저장고에서 상실한 열량과 같지만 저온부의 물의 온도는 고온부의 물의 온도 보다 낮다. 이것은 고온부가 상실한 것 이상의 엔트로피를 저온부가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 전체로 보아 엔트로피는 증가되었다.
그러면 엔트로피란 무엇인가? 열역학 제 2법칙은 다만 엔트로피의 변화만을 다룰 뿐 어떤 물체의 엔트로피의 절대량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전된 열량을 온도로 나눈 것 이상 어떤 것으로 엔트로피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
초기에 나타난 엔트로피에 대한 유익한 해석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엔트로피는 계의 열에너지가 일에 사용되지 못하게 된 정도에 대한 척도이다. 온도가 균등해짐에 따라 엔트로피는 증대한다. 온도차를 가지는 계만이 열에너지의 일부를 역학적 일로 바꿀 수 있다.
무질서로서의 엔트로피
더 만족스러운 한 해석은 엔트로피가 왜 증대될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엔트로피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열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19세기 말엽 까지 열은 한 물체로 부터 다른 물체로 흘러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유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몇가지 정량적 실험들은 이 견해를 지지했고,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다른 견해들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몇몇 소수의 물리학자들만이 열은 원자들의 무작위적 운동이라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었다. 물체속의 원자들의 운동은 두 성분으로 분해될 수 있다. 하나는 물체속의 모든 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운동으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운동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자들 마다 각기 다른 개개의 원자들의 무작위적인 운동이다. 이 무작위적 운동들의 총합이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열은 운동이지만 수조의 원자들의 무작위적인 집합적 운동이다. 어떤 순간에도 모든 방향으로 원자들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열은 개개의 원자들이나 개개의 물체들 처럼 운동에서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온도가 높아지면 원자들의 운동은 더 격렬해진다. 온도는 물체속의 원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이다.
엔트로피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열의 원자이론의 가장 탁월한 주창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츠만(L.Boltzmann)에 의해 다듬어졌다. 그는 학계가 자신의 이론을 거부함에 따라 절망에 빠져 1906년 자살했다. 그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실험적 증거가 볼츠만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볼츠만은 엔트로피를 분자차원에서의 무질서로서 정의했다. 그 이전 엔트로피에 관해서 가장 신비스럽게 생각해온 것은 그것은 항상 증가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열역학 1법칙은 2법칙 보다 직관적 수준에서 훨씬 더 수용하기 쉬운 것 처럼 보인다. 세계에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있는데 그것은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그 총량은 증대도 감소도 하지 않으며 항상 일정하다. 반면 엔트로피는 항상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엔트로피는 항상 증대할 뿐이기 때문에 많은 과정들이 비가역적이다. 한 그릇의 뜨거운 수프는 주변에 열을 내주고 자신은 미지근해진다. 결코 반대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지근한 한 그릇의 수프가 주변으로 부터 열을 빼앗아 스스로 뜨거워지는 일은 결코 없다.
이 비가역성은 물리학에서 새로운 개념이었다. 영화를 거꾸로 돌린다더라도 똑같이 가능한 상황을 보여줄 것이라는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 알려진 모든 물리법칙들은 가역적이었다. 예컨대 뉴턴의 법칙은 행성이 태양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돌든 그 반대 방향으로 돌든 두가지 상황 모두를 허용한다.
열에 대한 원자이론은 원자들을 거시계에 적용되는 예의 그`충돌법칙에 따라 충돌하고,반발하는 아주 작은 당구공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마찰없는 이상화된 공간에서의 탄성충돌에 적용되는 그 법칙은 가역적이다. 만일 열의 이전이 역학적 과정이라면 왜 그것은 가역적이지 않은가?
볼츠만은 가역적이지 않은 역학적 과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사용한 한 예는 두 색깔의 공을 섞는 것이다. 1000개의 검은 공과 1000개의 흰공이 큰 쟁반에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검은 공은 쟁반의 좌측에 있고, 흰공은 우측에 있다. 쟁반을 흔드면 두 색깔은 섞이기 시작한다. 조만간 완전히 뒤섞이게 될 것이다.
일단 무작위적으로 섞이게 되면 다음에는 아무리 더 흔들어도 원래 대로의 색깔대로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흔드는 것은 공들을 섞을 수는 있어도, 그것들을 분리할 수는 없다.
두 공들간의 충돌은 가역적이다. 비가역적인 혼합을 야기하는 것은 원자들의 집합적 차원에서 이다. 그러므로 혼합의 비가역성은 원리적 측면에서가 아니고 실제적 측면에서 이다. 쟁반을 아주 오랫동안 흔드면 두 색깔의 공들이 우연히 분리될 수도 있지 않으냐는 반론은 항상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있을 법 하지 않아서 결코 그런 사태를 관찰할 수 없을 것이다.
볼츠만은 열역학 2법칙이 통계적 법칙이라고 믿었다. 엔트로피는 분자적 수준에서 그 계의 무질서의 측도이다. 개별적 원자들의 충돌은 질서를 선호하는 것도 아니고 혐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작위적인 충돌의 결과는 항상 질서를 감소시키게 된다.
뜨거운 수프속의 분자들은 주변의 공기속의 분자들과 충돌한다. 수프의 분자들은 공기속의 분자들 보다 평균적으로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개개의 충돌은 두 당구공의 충돌과 아주 흡사하다. 빠른 공이 정지해 있는 공과 충돌하면 정지해 있는 공은 빠른 공의 운동량의 일부를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빠른 공의 속도는 줄어들게 된다. 분자들간의 충돌은 속도차를 없애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수프는 식고, 주변의 공기는 데워진다.
볼츠만은 클라우지우스의 엔트로피에 대한 정의를 더 일반적 형태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엔트로피가 무질서라면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서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정밀한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무질서는 꼭 집어서 이렇다고 말하기 어려운 개념이며 그것을 분명히 정의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실패했다. 무질서는 보는 사람의 관점과 예상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개념이다.
무질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사례를 통해서 예증해 보자. 하나는 잘 정돈되어 있고,다른 하나는 무질서한 두 사무실이 있다고 해보자. 둘다 모두 전화,책상,의자,타자기,화분,연필 등 사무실 집기와 용품들을 갖추고 있다. 전에 사무실을 전혀 본적이 없고, 물건들이 어디에 사용되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 두 사무실의 차이를 너가 설명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질서있는 사무실과 그렇지 않은 사무실을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은 무엇인가?
볼츠만은 이와 아주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은 상당한 정도 미적인 것이다. 우리 문화권의 모든 사람들은 무질서한 사무실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많은 내부구조를 보아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들은 분자들의 경우 그 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이해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참고해야할 아무것도 없다. 볼츠만은 그 계가 배열될 수 있는 방법의 수로 정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가능한 배열방법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계는 더 무질서하다.
아주 정돈이 잘 되어 있는 사무실은 모든 것들이 있어야할 장소에 있을 것이며 그 장소에 계속 놓여져 있을 것이다. 당신이 가끔 사무실을 방문해서 살펴보면 항상 같은 배열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무질서한 사무실에서는 모든 물건들은 제멋대로 놓여져 있을 것이다. 각 물건에 대해서 많은 가능한 배열이 있고, 전체 사무실에 대해서는 더 많은 배열의 방법들이 있다. 당신이 그 사무실을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조사해 보면 그 때마다 배열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한번 본 것을 당신은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볼츠만의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정의는 통계적인 것이다. 그것이 질서있는 사무실인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수 차례 사무실을 방문하여 그 장소가 얼마나 많은 배열들의 변화를 보여주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단 한 차례의 방문으로는 아무것도 결정지을 수 없다. 이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볼츠만의 정의에는 미적인 편견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아주 다른 문화권 -여기서는 의자가 책상을 등지고 있고, 수화기가 전화기 본체로 부터 따로 떨어져 있으며 모든 가구들이 방의 북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등 우리와 다른 문화양식을 가진 문화권- 에서 온 사람이 사무실을 방문했다고 하자. 우연히 그는 그 사무실에서 이런 배열 -우리의 관점에서 무질서한 배열- 을 보았다고 하자. 그는 이 사무실이 질서있는 사무실이고, 다른 사무실은 마치 태풍이 지나간 것 처럼 무질서한 사무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방문 횟수가 많아지게 됨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 처럼 사무실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질서한 사무실은 방문할 때 마다 다른 배열을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첫 방문 때의 그 사무실이 특별한 질서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배열은 우연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 배열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일정한 배열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사무실은 그 유지에 상당한 노력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원자의 계내에서 물리학자들은 "거시상태"와 "미시상태"를 구분한다. 거시상태는 "섭씨 0도,1기압에서 산소 1리터" 처럼 관찰가능한 상태이다. 미시상태는 그 계내에서 원자들의 정확한 배열이다. 1리터의 기체는 항상 움직이고 있고, 그래서 거시상태는 변하지 않는다더라도 미시상태는 항상 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거시상태에 천문학적인 미시상태가 대응하고 있다. 무질서한 사무실은 모든 가능한 배열의 미시상태를 갖고 있다. 질서있는 사무실은 하나의 미시상태만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아주 희귀한 것이다. 원자의 계에서 기체는 액체 보다 더 많은 미시상태를 갖고 있고, 액체는 고체 보다 더 많은 미시상태를 갖고 있다. 기체분자는 용기의 벽에 계속해서 충돌하면서 충돌 때 마다 그 용기내에서의 장소를 바꿀 것이다. 액체분자의 장소는 그 액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에 한정되며 이 공간내의 어떤 장소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고체는 가장 높은 질서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원자들은 자신에 할당된 결정격자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자는 그 장소에서 진동할 수 있을 뿐 멀리 벗어날 수 없다.(그럴경우 그것은 액체로 변할 것이다.)
거시상태의 엔트로피는 미시상태의 가능한 배열의 수로서 정의된다. 이 수는 통상 무한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의 원자들은 연속적 공간 속의 어느 장소를 점할 것인데 연속량은 무한히 가분가능하므로 배열 방법도 무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볼츠만은 연속적 공간을 불연속적 구간으로 분해했다. 그는 미시상태의 배열의 수를 직접 다루는 것 보다 그 수의 로그값을 사용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볼츠만은 엔트로피를 상수 곱하기 미시상태들의 수의 로그값으로 정의했다.(S=k logW) 로그의 사용은 계산의 필요성에 의한 것임으로 여기서 신경쓸 필요는 없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지표이고 그 무질서는 가능한 배열들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엔트로피에 대한 볼츠만의 견해는 철저히 환원론적이다. 열역학 제 2법칙은 근본적인 법칙이 아니고 더 근본적인 운동법칙에 따르고 있는 원자들의 집합적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적으로 복잡계에 일어나는 모든 미시상태는 무작위적이다."는 자각이 그의 주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미시상태는 아무런 명백한 패턴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원자들의 위치와 속도가 너무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 온도나 압력과 같은 거시 규모의 속성들이 그 계 전체를 통해서 일양하게 보일 뿐이다.
온도나 압력차가 없는 계는 열역학적 평형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계가 열역학적 평형상태로 향해가는 이유는 단지 미시상태들의 등분포가 가장 높은 확률을 갖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해 가려는 경향은 사무실이 혼잡스러워지는 경향과 똑같다. 사무실안의 물건들의 모든 가능한 배열들을 생각해보라. 대상의 위치가 최소한 1인치 이상 떨어져 있는 경우에만 다른 배열로 간주, 계산한다더라도 그 배열들의 수는 천문학적 수이다. 이 배열들의 99.999..%이상이 무질서한 것에 속한다. 가령 의자가 책상 아래에 놓여있지 아니한 배열들은 우리의 세계에서 의미있는 배열이 아니지만 의자의 가능한 위치의 대분이 책상 아래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마찬가지로 전화기의 가능한 배열들의 대부분은 책상위가 아니며 서류들의 가능한 배열들의 대부분은 서류함이 아니다.(알파벳 순은 분명 아니다) 질서있다고 우리가 느끼는 배열들은 무질서하다고 느끼는 배열들 보다 훨씬,훨씬 적다. 낮 동안 여러가지 물건들이 무심결에 옮겨진다. 이 임의적인 이동이 질서있는 미시상태를 만들기 보다 무질서한 미시상태를 만들기가 훨씬 더 쉽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의미론(semantics)적 논의이다. 가능한 배열들의 우주들의 집합 가운데 한 부분집합을 선택하고 그것을 질서하고 부른다. 사무실이 무질서해져 가는 경향의 정도는 질서에 대한 우리들의 정의에 직접 비례한다.
질서를 어떻게 정의내리더라도 그 상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무질서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무질서의 경향이 일반적이다. 책상이 뒤집혀져있고, 가구들이 방의 북서쪽에 쌓여 있는 문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만큼이나 청소부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들 역시 방의 배열의 우연적인 뒤바뀜을 질서라고 정의하지 않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무질서의 정의에 주관성의 개입을 대부분 배제할 수 있다. 원자들의 계내에서 온도,압력과 같은 몇가지 거시적 규모의 속성들만이 쉽게 측정될 수 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관찰가능한 성질들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는 거시적 상태만을 다룬다. 그러한 거시적 상태의 하나가 맥스웰의 악마가 만들어 낼려고 하는 것이다. 용기를 둘로 나누어 한쪽은 2기압의 공기를,다른 쪽에는 0기압의 공기를 넣는다. 그 사이에 칸막이가 없다면 압축된 공기가 진공으로 밀려 들어올 것이다. 그 이유는 공기가 진공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다. 개개의 분자들은 옆칸이 진공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며 단지 운동 법칙에 따라 이리저리 충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자들이 배열될 수 있는 천문학적 배열방법 가운데 그 대부분이 최대 엔트로피와 열역학적 평형상태이다. 칸막이가 제거되면 곧 승산(odds)은 전체를 1기압으로 하는 미시상태 쪽으로 기운다. 이 승산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높은 압력의 기체가 낮은 압력의 칸 쪽으로 팽창하는 것 외의 사태를 관찰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열사
열역학은 물리학 가운데 엄격한 확실성을 요구하지 아니하는 최초의 분야였다. 원자세계의 세부적 상태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자들의 집합적 상태에 관해서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예측들은 확실하지 않지만, (진공을 채우는 기체와 같은 그러한 경우 처럼) 많은 경우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그 정도의 정확성으로도 충분하다. 열역학적 분석은 우주론자들이 라플라스의 꿈 -개개의 원자들의 위치나 속도와 같은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하고도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예측하는 것- 의 상당 부분을 실현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열역학은 세계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 볼츠만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풍부한 다양성과 질서를 가진 우주와 열역학 제 2법칙간의 모순이었다. 우주는 정의상 닫힌 계이다. 그것은 또한 가장 큰 가능한 계이다. 그러므로 열역학 제 2법칙은 전 우주에 적용될 때 가장 확실할 것이다. 우주의 엔트로피는 매초 비가역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볼츠만 세대의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열적 죽음인 "열사"(Warmestod)라는 유령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에너지들은 궁극적으로 열의 형태로 퇴화할 것이고, 모든 온도차도 소멸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 때 엔트로피는 최대상태가 될 것이다.
열사의 우주도 지금의 우주만큼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에너지가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큰 규모의 변화는 어떠한 것도 불가능하다. 주목할만한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열사는 모든 별들의 소멸을 가져오는데 왜냐하면 별이라는 것은 결국 에너지의 집적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모든 생명의 종말을 의미한다.
맥스웰의 악마에 대한 반박
맥스웰의 악마의 파라독스는 지적 존재는 열역학 제 2법칙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고안된 것이다. 인간은 흰공과 검은 공이 섞여 있는 것을 도로 두개의 더미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시세계의 악마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것은 크게 불합리하게 들리지 않는다. 맥스웰은 우리가 든 예 처럼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온도에 의해서 분자들을 분류하는 악마를 제시했다. 악마는 상대적으로 빠른 분자를 한 방에, 또 상대적으로 느린 분자를 또 다른 방에 넣도록 문을 열고 닫는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두 방 사이의 온도차를 만들어 낸다. 이 온도차이는 증기엔진을 돌리는데 이용될 수 있다. 악마가 온도에 의해서 분류하든 압력에 의해서 분류하든 이 파라독스의 본질에는 큰 차이가 없다. 어느 경우든 악마의 행위가 엔트로피를 줄일 것이다. 이 악마가 열역학 제 2법칙을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몇가지 비판들을 살펴보자.
상황설정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아무런 의미도 없다.
원자 크기의 악마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이런 논의를 더 깊이 다룰 필요가 있는가? 많은 물리학자들은 맥스웰의 이 환상이 열역학에 실제 어떤 위협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물체를 위로 떨어지게 하는 악마를 상상할 수는 있다고 해서 그것이 중력의 법칙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악마를 자동장치로 대체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렇다." 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악마를 가공의 것으로 간주 배격하고 있지만 섯불리 배격해서는 안되며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는 물리학자들도 있다. 압력에 따라 분류하는 악마는 기계적으로 쉽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저압부에서 고압부로만 열리도록 경첩이 달린 쪽문이 있다고 하자. 분자는 쪽문을 밀 수는 있으나 당길 수는 없기 때문에 고압부의 방에 있는 분자는 쪽문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쪽문을 통상 닫힌 상태에 있도록 하는 스프링이 달려 있다. 또 이 스프링의 압력을 적절히 조절하여 저압부에서 쪽문과 충돌한 분자들이 쪽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쪽문이 저절로 닫히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은 자동화된 악마의 간단한 모델이다. 가버(D.Gabor)와 브릴로인(L.Brillouin)은 더 정교한 모델을 개발했다. (비록 이것은 맥스웰의 시대에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계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악마의 비실재성의 여부가 아니라 분류작용 자체의 성립 여부이다.
악마라도 열역학 제 1법칙을 어길 수는 없다.
얼핏보면 악마의 영구운동기관은 열역학의 제 1, 2 두 법칙을 모두 위반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제 1법칙은 어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모든 물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악마의 작용이 개개의 분자들이나 그것들의 집합체들이 따르고 있는운동의 기본법칙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충돌에서 충돌하는 분자들의 에너지가 증가하고 있는 것도 감소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악마가 압력에 따라 분류하는 사례를 보자. 악마는 일정한 부피의 기체를 반으로 압축시키고 있다. 이것을 하면서 그는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분자에 아무런 작용도 가하고 있지 않다. 모든 개개의 분자들은 압축전과 똑같은 평균속도로 운동하고 있다. 압축된 공기의 온도도 변화되지 않았다.
악마의 작용이 실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압축된 공기를 팽창시켜야 한다. 이 팽창된 공기가 터빈을 돌릴 것이다. 분자들이 터빈에 속도의 일부를 넘겨준 만큼 공기의 온도도 또한 내려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악마가 실제로 이것을 작용 이전의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데 있다. 그가 그의 기계로 부터 에너지를 추출한 결과 공기의 온도가 본래 보다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악마는 공기가 다시 데워지기를 기다렸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맥스웰의 악마가 작동시키고 있는 것은 "제 2종 영구 운동기관"이다. 그것은 열에너지를 일로 바꿈으로 열역학 제 2법칙을 어기고 있다. 그러나 제 1법칙을 어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악마의 분류작업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가?
만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면 이것은 열역학 제 2법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를 사용해서 국부적으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것은 2법칙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엔트로피가 증대한다) 냉장고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냉장고는 에너지를 소모해서 외부와 내부의 온도차를 만들고 있다. 냉장고를 가동시키기위한 전력을 고려한다면 국부적인 엔트로피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알짜 엔트로피는 증대되고 있다.
쪽문을 열고 닫는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에너지 역시 온도차 또는 압력차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에서 나와야 한다. 이렇게 볼때 앞서 기술한 스프링 밸브가 의심스럽다. 고압부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각의 분자가 스프링을 밀어야 한다. 이것은 분자의 속도를 약간 -그것이 아무리 무시할 만큼 작은 것이라 더라도- 줄여 놓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압부의 방으로 들어간 분자들의 온도가 약간 낮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스프링의 장력을 줄임으로 이 문제를 회피할려고 해도 소용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쪽문이 닫히는 속도가 느려질 것이고 그 사이 고압부의 방에 있던 분자들이 저압부의 방으로 빠져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러한 간단한 스프링 밸브는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맥스웰이 제시한 본래의 악마에는 이러한 문제가 없는데 그것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는 분자들을 단지 관찰만 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쪽문을 연다. 여기서는 쪽문에 어떤 종류의 스프링이 달려 있을 필요가 없다. 쪽문은 원하는 만큼 가볍게 하고, 거의 완벽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악마는 분자가 쪽문으로 접근하는 순간에 미리 쪽문을 열 수 있다. 그러면 그 분자는 쪽문과 접촉할 필요도 없다. 물론 여기서도 쪽문을 여는데는 에너지가 들겠지만 그 에너지는 원하는 만큼 작게 할 수 있으므로 분자들의 출입을 통해 얻은 에너지에서 여기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충분히 조달할수 있다. 이것을 상쇄한 알짜 에너지는 악마가 열역학 제2법칙을 어기면서 얻어낸 것이다.
지금까지는 완벽하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분자들이 스스로 쪽문을 열어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도록 언제 쪽문을 열어야 할지를 악마가 미리 알아야 하는데(이것도 물론 분자를 탐지하는 전자눈을 장착시킴으로 자동장치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쪽문도 브라운 운동에 따라야 한다
1912년 스몰루초프스키(M.von Smoluchowski)는 브라운 운동이 악마의 기획을 좌절시킬수 있음을 지적했다. 즉 작은 물체들의 무작위적인 표류가 모든 방향에서 분자들간의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악마는 언제 문을 열어야할지 미리 알수 없을 것이다. 이 지적은 어떤 측면에서 사실이다. 만일 느린 분자와 빠른 분자가 두 방향에서 쪽문에 동시에 도달한다면 악마는 안전하게 쪽문을 열 수 없을 것이다. 느린 분자도 함께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가 극복하기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분자대 분자의 기반에서 충돌을 다룰 수 있도록 쪽문을 분자크기 정도로 충분히 작게하면 된다. 그렇게되면 두 분자가 동시에 쪽문에 도달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브라운 운동이 일으키는 충돌이 있지만 만일 악마가 분자가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브라운 운동의 무작위성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그의 기획을 성공시킬수 있다.
양자역학이 악마의 기획을 망쳐 놓는다.
이것은 1939년 슬래트(J.C.Slater)에 의해서 제시되었는데 이 파라독스와 관련해서 자주 논의거리가 되고 있다. 맥스웰은 물론 이것을 알 수 없었지만 원자(그리고 소립자)는 작은 당구공 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들은 입자 보다는 오히려 파동 처럼 행동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이것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동시적 측정에서 본질적인 불확정성을 야기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입자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알면 알수록 그것의 속도가 부정확해 지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입자가 작으면 작을 수록 이 불확정성은 더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그의 쪽문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악마는 쪽문 가까이로 접근하는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해야만 한다. 그는 분자의 궤도를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측정 결과 분자가 오른쪽 방향으로 부터 들어올 것이라는 대략적인 판단이 섰을 때 쪽문을 열면 된다. 그럴 경우 실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악마는 쪽문을 열어서는 안될 때 쪽문을 열어 명성에 손상을 받기도 할 것이다. 또 쪽문을 열어야 될 때 열지 않아 기회를 놓치기도 할 것이다. 이 결과 악마의 분류행위가 늦어지기는 하겠지만 결코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악마가 분자의 위치와 속도에 관한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한 승산은 결국 그에게 있다. 양자적 불확정성은 악마를 "근시안"으로 만든다. 그가 분류하고자 하는 분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의 근시는 더 악화된다. 그러나 전적으로 눈이 멀어지는 경우는 결코 없다. 게다가 낮은 압력에서 양자적 불확정성이 문제되지 않을 만큼 아주 큰 기체분자( 우라늄,불소화합물 등)도 있다. 악마가 봉착하게 되는 난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악마의 화폐위조
맥스웰의 악마의 경제학판을 보자. 이 상황설정이 본래의 파라독스와 유사성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논의가 진행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악마는 자기나라의 모든 것 -전 토지,모든 가옥들,모든 차들,모든 곡물,기타 일체의 것- 을 획득함으로써 나라전체의 부를 한손에 거머지려는 사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로 부터 훔치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을 할 마음도 없다. 그래서 그는 화폐를 위조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그 나라의 중앙은행의 화폐감식가도 차이를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아주 정밀한 자기나라 화폐의 판형의 복사판들을 만든다. 이것은 누구의 것을 사기쳐서 빼앗는 것은 아니라고 악마는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의 위조화폐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위조된 것임을 전혀 알 수 없으며 진짜 돈이나 마찬가지로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악마는 그 나라의 모든 재화의 시장가격이 10억 달라라고 추산해 낸다. 그는 10억 달라를 인쇄한 뒤 그것을 뿌리는 일에 착수한다.
악마의 위조행위는 영구운동기관의 경제판이다. 그것 역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악마의 첫 위조화폐는 정상적인 화폐와 똑같은 구매력을 갖고 있다. 문제가 표면화되기 전에 그는 수백만 달라를 사용했었을 수도 있다. 그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것은 과대망상적인 규모의 그의 위조행위이다. 그는 그 나라의 모든 상품들을 금액으로 환산한 뒤 그 만큼의 돈을 찍어 내었다. 그가 위조한 돈의 양은 적어도 유통되고 있는 정상적인 돈의 양 만큼은 된다. 따라서 악마의 위조행위는 그 나라의 경제에 아주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악마의 위조화폐는 돈의 과잉공급을 낳고 그 나라를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몰아 넣을 것이다. 악마도 물건을 사기위해 계속해서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가 소비하는 돈이 많으면 많을 수록 가격은 더욱 오르게 된다. 물건을 미처 다 구입하지도 못한채 악마의 10억 달라는 곧 바닥나고 말 것이다.
물론 악마는 많은 돈을 더 찍어낼 수있다. 결국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돈은 실제 모두 악마의 위조화폐일 것이다. 그 악마는 빵 한덩어리를 사기위해 10만 달러(최고의 평가절하)를 가득 채운 손수레를 끌고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의 인쇄소의 인쇄능력은 무한하다.
더 많은 양의 돈을 찍기 위해서 악마는 더 많은 양의 종이와 잉크가 필요할 것이다. 어느날 그 악마는 인쇄용품들을 사기위해 10만 달라가 든 손수레를 끌고 가야할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종이와 잉크가 든 손수레가 훨씬 가벼워진 것을 깨닫게 된다. 구입한 종이와 잉크가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사용한 돈 보다도 더 가볍다면 그 비용을 댈만한 충분한 돈을 인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대량의 화폐위조가 좌절하는 이유다. 결국 화폐의 위조는 통화를 팽창시켜 돈이 동량의 종이의 가치 보다 더 떨어지게 한다. 더 이상의 화폐 위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당신은 그럴 경우 오히려 돈을 잃게 된다.
정보와 엔트로피
분자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악마가 봉착하는 문제는 분류행위 자체가 분류를 망쳐 놓게 된다는 점이다. 악마의 분류가 그 계를 크게 교란시키게 되어 결국 악마는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된다.
폰 노이만의 베를린 대학 재직시 그의 동료였던 질라드는 맥스웰의 악마에 대한 최초의 현대적 분석을 제시했다. 그는 "열역학적 계에서 전능한 지적 존재에 의한 엔트로피의 감소에 대해서"(물리학 연보 53, 840-865면,1929)라는 논문에서 이 악마의 파라독스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파라독스를 보는 그의 방식은 20년후 샤논)에 의해서 제창된 정보이론을 예견하고 있다. 질라드는 그 계에 대해서 실험자가 가진 정보 자체도 그 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관찰대상들을 초월해서 있으면서 그것들의 전모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러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폰 노이만이 지적한 것 처럼 "관찰은 비가역적 과정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적 불확정성도 자주 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양자적 불확정성은 맥스웰의 악마를 망쳐 놓는 정보이론의 한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후자의 한계는 비단 양자 물리학의 원자 뿐만 아니라 고전물리학의 입자 -아주 작은 당구공- 에도 적용된다.
질라드와 그의 작업을 계승한 학자들은 "모든 것의 지식"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폭로시켰다. 하나의 가스 분자의 위치 조차도 100 %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관찰은 항상 그 대가로서 엔트로피의 증대를 수반한다. 결국 모든 관찰이 쓸모 없어지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된는데 관찰이 엔트로피만 증대시킬 뿐 더 이상 충분한 정보는 산출되지 않는다.
질라드는 실린더로된 방에 단 1개의 기체분자만 있는 맥스웰의 악마에 대한 아주 간단한 실험을 구상했다. 그 분자는 방의 벽과 충돌했다가 되튀기고 다시 충돌하고...를 되풀이 할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경로는 실린더 내부의 모든 부분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 분자는 어떤 특정 순간에는 어떤 특정 지점에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실린더의 반쪽 상단에 있고, 악마가 관찰을 통해서 이것을 확인했다고 하자. 그 다음 악마가 해야할 일은 마찰없는 둥근 피스톤을 실린더의 중간에 삽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자의 위치가 피스톤의 상단부에 한정되도록 한다. 분자는 피스톤과 계속해서 충돌할 것이고 그때 마다 그것은 피스톤을 미미하지만 아래로 밀게 된다. 결국 이 분자는 아래의 진공쪽으로 팽창하면서 피스톤을 밀게 된다..이 피스톤의 하방운동(아주 아주 느리겠지만)은 일에 사용될 수 있다. 분자의 이 작용으로 결국 피스톤은 실린더의 바닥에 닿게 될 것이다. 그 다음 더 이상 에너지 추출은 없다.
질라드가 말하고자는 바는 에너지는 일종의 상품이라는 것이다. 악마는 처음에 분자가 실린더의 반쪽 상단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후 그는 분자가 실린더내의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되었다. 악마는 에너지를 얻었지만 정보를 그 대가로 지불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기 위해서는 악마는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분자의 위치를 다시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질라드의 논증에서 강조할 필요성이 있는 아주 중요한 연결점이다.
당신은 악마가 왜 실린더의 중간에 피스톤을 도로 갖다 놓을 수 없는지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만일 악마가 피스톤을 중간지점으로 도로 밀어 올리려면 분자의 압력에 대항해서 피스톤에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것을 위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데 이것의 양은 앞서 얻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양의 에너지이다. 상호 상쇄되어 악마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이 난점을 피하는 방법은 피스톤을 실린더 밑으로 빼는 것이다. 실린더 바닥이 나사로 고정된 것이라면 분자가 빠져 나가기 전에 그것을 풀어 피스톤을 재빨리 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피스톤의 중간에 홈이 있다면 피스톤을 실린더안으로 밀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피스톤을 이동시키기 위해 분자에 대해서 일을 해야할 필요가 없다.( 실린더 밖에서의 일은 무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악마는 분자를 관찰하지 못했다. 그래서 피스톤은 도로 밀어넣었지만 악마는 이제 분자가 상단 또는 하단 어느쪽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실린더의 중앙에 있는 피스톤이 위로 밀려갈지 아래로 밀려갈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피스톤에 속도조절 손잡이가 달려있다고 하자. 그리고 피스톤의 하방이동이 손잡이를 시계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조정되어 있다고 하자. 이때 피스톤이 위로 움직여 손잡이가 시계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돌다가 멈출 확률은 아래로 움직일 확률이나 마찬가지로 50%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손잡이가 어느 방향으로 돌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손잡이가 2개 달려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손잡이들에 스윗치가 부착되어 있어 피스톤이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는 스윗치가 켜져 한 손잡이를 시계방향으로 돌리고, 반면 위로 움직일 때는 다른 스윗치가 켜져 손잡이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린다. 결국 두 손잡이들은 더욱더 빨리 돌게 되어 이것은 유용한 일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피스톤과 스윗치로 된 이 계는 분자의 근사적 위치(위 또는 아래)를 측정하는 장치 이상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마가 그의 영구운동기관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분자의 위치에 관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고 결론지을 수있다.
맥스웰은 이 악마가 분자의 위치와 속도의 정확성의 정도를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높혀갈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질라드는 이러한 가정적인 전지적 능력은 가공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지식은 항상 관찰의 결과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정확성의 정도를 제한한다. 질라드와 가버,블릴로인 같은 물리학자들은 악마가 분자의 위치에 관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검토했다.
사례1: 분자의 위치를 제한한다.
질라드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관찰"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어서 실제의 계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실린더안에 한개의 분자로 된 실라드의 계를 생각해 보라. 악마가 분자의 위치에 관해서 물을 수 있는 질문은 고작 그것이 실린더의 상단에 있느냐,하단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상황을 좀더 실제에 가깝게 하는 방법은 실린더의 바닥에 피스톤을 놓고 그것을 중간부 까지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분자는 실린더의 상단부에 있게 될 것이다. 또는 피스톤을 실린더의 천장에 두고 그것을 아래로 밀어 내려 분자가 실린더의 하단부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똑같은 절차인데 에너지를 요구한다는 이유에서 거부되어졌다. 이것은 일상적인 관찰과 유사한 것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악마는 분자의 본래의 위치에 관한 정보를 모두 잃어 버렸다. 오히려 그는 분자가 실린더의 어느 부위에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실린더의 특정 부위에 분자를 가두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유형의 관찰은 우리의 일상적인 관찰과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간단하기 때문에 질라드는 이것을 분석의 대상으로 택한 것이다. 그는 분자의 위치확정은 에너지를 소모할 뿐 아니라 분자의 위치에 대한 증가된 정보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해서 상쇄되어 버린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이 엔트로피의 증대는 분자수준에서의 무지의 증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악마가 실린더의 바닥에 피스톤을 삽입해서 그것을 중간지점까지 밀어 올렸다고 하자. 결국 그는 대단히 희박한 기체(단 한개의 분자)를 압축해서 부피를 반으로 줄인 것이다. 피스톤에 대한 분자의 반발은 피스톤의 상방운동을 저항한다. 동시에 피스톤은 운동량의 일부를 분자에게 이전해 주고 있다. 그 결과 분자의 속대 증대는 온도의 상승을 일으킨다. 이것은 기체가 압축되었을 때 온도가 상승하는 친숙한 현상과 다르지 않다.
질라드는 논의를 단순화시키기 위해서 분자가 압축과정을 통해서 동일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실린더의 벽과 그 외부가 효과적으로 열을 전도시킬 수있다고 가정했다. 더 나아가 실린더의 외부는 실린더와 분자들로 구성된 계 보다 훨씬 커서 압축과정에서 발생한 열이 외부 온도의 상승을 초래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가정했다. 그 경우에 피스톤에 공급한 에너지는 모두 분자로 이전되었다가 열로 전환한다. 이 열에너지는 실린더 밖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열이 흐를 때는 언제나 엔트로피의 변화가 있다. 분자 한개에 대항해서 피스톤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이 에너지는 일정량의 열과 등가이다. 이 열을 실린더의 온도로 나누어 보자. 결과는 실린더의 엔트로피의 감소이다. 똑같은 양의 열이 실린더 밖으로 빠져 나간다. 그래서 외부계의 엔트로피 증대분은 실린더내의 엔트로피 감소분과 똑같다.
악마는 실린더내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이전 보다 분자의 위치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피스톤을 삽입하기 전에는 분자는 실린더 내의 어느 곳에든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온도에 의해서 허용된 어떤 범위의 속도도 가질 수 있었다. 악마의 개입이후 온도가 변하지 않았으므로 속도의 범위는 종전과 같지만 가능한 위치의 범위는 반으로 줄어 들었다. 그 계의 (속도와 위치의) 전체 가능성의 수는 반으로 줄었다.
실린더의 외부는 실린더 밖의 전 우주이다. 외부 엔트로피의 증대는 실린더의 엔트로피의 감소와 똑같다는 것( 열을 온도로 나누는 클라우지우스의 정의), 실린더의 엔트로피의 감소는 가능성의 수(엔트로피는 가능한 배열들의 수라는 볼츠만의 정의)의 반으로의 감소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으로 부터 실린더 밖의 외부 -전 우주- 의 엔트로피는 2배 만큼 증가해야 한다는 것이 나온다.
이것이 질라드의 주장의 핵심이다. 분자 1개에 대한 지식의 증가는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무지의 증가에 의해서 정확히 상쇄된다. 만일 악마가 실린더의 바닥으로 부터 천장으로 99% 까지 밀어올린다면 그는 분자의 위치에 대해 100배 더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열을 발생시키고, 그 열은 주변으로 흡수되어 실린더 밖의 분자들의 가능한 속도와 위치의 범위를 100배 만큼 증대시키게 된다.
이것의 놀랄만한 귀결들을 잠시 후에 좀더 철저히 검토해 보자. 그에 앞서 악마가 분자를 관찰할 수 있는 다른 방법 몇가지를 살펴보자. 질라드의 상황설정은 너무 협소해 보이고 특히 악마의 "관찰방식"이 너무 소박하다. 맥스웰은 악마가 분자를 관찰하도록 했지만 한개의 분자를 본다는 개념이 모호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분자수준에서 대상을 보는 3가지 방식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사례2: 주변의 빛으로 대상을 본다
모든 물질은 빛을 방출하며 방출하는 빛의 진동수는 온도의 함수이다. 실내온도의 대상의 경우 그 진동수는 적외선의 범위내에 있다. 그래서 만일 악마가 적외선을 감지할 만큼 미감한 눈을 가졌다면 밀폐된 방의 실내가 붉은 열기로 덮혀 있음을 보게될 것이다. 악마는 분자와 충돌 ,되튕겨 자신의 눈으로 들어온 적외선의 광자(빛의 기본 "입자")를 보게될 것이다. 그는 분자를 관찰할 것이다.
이 생각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 실제로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대상과 충돌해서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광자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광자 만큼 중요한 것은 광자가 갖고 있는 방향에 대한 정보이다. 태양은 하늘의 특정 위치에 있다. 만일 눈이 태양과 다른 방향에서 오는 광자를 포착했다면 어떤 대상이 광자를 그 방향으로 부터 반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는 이 악마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우선 방에는 아무런 분자도 없고 단지 적외선 광자들만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광자들은 이른바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광자들이 열역학적 평형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자들은 모든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으며 방의 어느 지점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확률은 모두 같다. 악마는 광자들이 모든 방향에서 날라오는 것을 본다.
이 방에 단 한개의 분자가 들어옴으로써 어떻게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악마가 본 몇개의 광자들은 분자와 충돌할 것이다. 그리고 분자와의 상호작용이 광자의 경로를 바꿔놓을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광자들에 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으므로 악마는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없다. 분자가 있는 상황이든 아니든 광자들은 모든 방향으로 부터 날라올 것이다. 악마는 분자와 충돌한 광자를 진동수의 변화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마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흑체복사 상태에서 광자들은 분자 및 그 방의 벽과 온도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악마의 방은 두개의 분자들을 가질 수도 있고 또는 100,000,000,000,000,000 개의 분자들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흑체상태하의 광자의 "정보"는 이미 뒤죽박죽 될대로 뒤죽박죽 되어졌다. 분자들의 개입이 또 다른 뒤죽박죽을 일으킨다더라도 그 효과는 더 이상 탐지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악마가 보게되는 모두는 광자의 무작위적 충돌이 만들어내는 스노우(snow) 현상 뿐이다.
사례3: 후랫쉬를 사용한다.
그래서 어떤 것을 보기 위해서는 악마가 스스로 빛을 발사해야만 한다. 그것은 동조상태의 광선 -분자와의 충돌에 의한 방향의 변화가 탐지될 수 있게 최초의 방향이 알려져 있는 빛- 이어야만 한다. 이때 악마의 후랫쉬의 필라멘트의 온도는 방의 온도 보다 훨씬 고온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반사된 광자들은 실내 자체에서 나오는 흑체복사와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자의 위치와 속도에 관한 정보를 얻는 아주 그럴듯한 방식이다. 그러나 또 다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브릴로인은 관찰로 인한 엔트로피의 변화를 계산했다. 1개의 분자의 위치를 관찰하기위해서는 그것과 충돌할 (적어도) 1개의 광자가 후랫쉬로 부터 공급되어야 한다. 이 광자는 고온의 필라멘트로 부터 받은 열을 분자와 그 방과 그 주변으로 전달할 것이다. 자발적인 열의 흐름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엔트로피의 증가가 있다.
브릴로인의 계산에 의하면 엔트로피의 증대는 통상 악마가 얻은 정보의 양을 초과하며, 최소한 같다. 후랫쉬에 의한 관찰은 질라드의 피스톤에 의한 관찰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실 브릴로인은 악마가 두 방의 기체들간의 온도차를 만들려면 분류하기를 포기하고 후랫쉬의 필라멘트를 어느 한 방을 가열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례4: "아양자"(sub-quantum)를 사용해서 본다.
후랫쉬로 볼 때 생기는 문제는 어쩌면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보는데 사용하는 입자들(광자)은 "크기"를 가지고 있고, 분자들에 비견할만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더 작은 입자를 사용한다면 이 문제가 어쩌면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알려져 있는 모든 아원자적 입자들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다. 광자를 사용하든, 전자를 사용하든,아니면 양자를 사용하든 그 어느것이든 그 현미경의 분해능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아원자 입자(소립자) 보다 훨씬 작은 새로운 유형의 입자를 상상해 볼수있다. 여기서 "더 작다."는 것은 더 적은 질량과 반경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자들을 아양자라 부르고, 이것들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아양자 입자를 사용해 더 높은 분해능을 가진 현미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악마는 이것을 가지고 분자들을 관찰하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현미경은 동조상태의 아양자 입자들의 광선을 분자들에 쏘고 그 반사된 입자들을 통해 분자들의 위치와 속도를 알 수 있다. 이 아양자 입자들은 에너지를 분자들에 이전시키고 그 결과 약간의 열이 그 계로 이전될 것이다. 그런데 이전되는 열은 입자의 운동량에 비례하는데, 우리가 가정한대로 아주 작아 질량이 거의 0이므로 아양자 입자의 운동량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작다.
여기에 어떠한 잘못이 있는가? 전혀 없다. 만일 아양자 입자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아마 분자들을 분류하는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양자 입자를 가지고 고찰한 분자들의 분류는 광자를 가지고 고찰한 흰공,붉은 공의 분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아양자 입자들은 맥스웰의 악마의 파라독스를 아양자 영역으로 전가시키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결국 더 작은 악마가 아양자 입자들을 분류할 수 없을지 또 궁금해 할 것이다. 이제 이 더 작은 악마도 악마와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맥스웰의 악마는 물질과 에너지의 가장 낮은 레벨에서 작동한는 것으로 가정되어야 한다. 그의 어려움은 물리학의 분야들 가운데 어느 것 보다 더 넓은 범위에 걸쳐있다. 이것은 정보이론과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악마가 입자와 파동을 단지 다른 입자들과 파동들을 관찰함에 의해서 배울 수있다면 악마는 그것들 보다 먼저 출현할 수 없다.
경험적 지식의 한계
요점은 전지(全知)와 관찰을 통해서 얻어져야 하는 지식간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두 칸으로 구분된 기체의 용기에 기체를 분류하기위해 문이 닫히고 열리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 개폐는 실제적 과정이므로 다음과 같이 쓸 수있다. 40나노초(nanosecond;10억분의 1초) 동안 열리고, 12나노초 동안 닫히고, 다시 350나노초 동안 닫힌다. 만일 악마가 이 순서를 알고 있다면 그의 영구운동기관은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이 순서를 알고자 하는 악마의 어떠한 시도도 결국 실패하게 된다.
맥스웰의 파라독스에 대한 변형인 질라드의 "실린더-피스톤과 1개 분자"는 경험적 지식의 한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다. 악마는 분자의 수직위치를 정확하게 알기를 열망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실린더의 꼭대기에 실린더를 삽입한다. 처음에는 분자는 실린더내의 어디에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악마는 실린더의 중앙에 이를 때 까지 피스톤을 아래로 밀어 간다. 이제 분자의 위치의 불확실성은 반으로 줄었다.
이론적으로는 피스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도 99.99999999999999999999 %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분자는 그 나머지의 아주 작은 공간속에 있을 것이다. 이때 분자의 수직위치에 대한 불확정성은 10,000,000,000,000,000,000,000분의 1로 감소한다.
이제 다시 피스톤을 밀자. (이상기체인) 이 분자는 1기압에서 각 분자가 차지하고 있는 만큼의 공간을 가질려고 할 것이다. 이 분자는 피스톤과 바닥 사이에서 아주 빈번히 충돌하면서 마치 정상 기압에서의 기체처럼 행동할 것이다. 이 압축은 열을 발생시킨다. 이제 실린더의 바닥은 눈에 띄일 정도로 데워진다.
악마의 세계에 대한 지식의 총량은 증가했는가? 질라드의 분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악마는 이제 실린더 밖의 우주의 상태에 대한 불확실성이 10,000,000,000,000,000,000,000 배만큼 증가했다.
그 과정에 만들어진 열이 바로 불확실성을 야기한 범인이다. 악마는 기체를 압축시키기 위해서 역학적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한다. 이것은 악마의 팔속에 있는 원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운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 에너지를 계에 주는 대신에 악마는 열을 받게 된다. 열은 원자들의 무작위적 운동이다. 계가 뜨거워지면 질수록 그 속의 원자들의 위치와 운동은 더 불확실해진다. 외부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의 정도가 10,000,000,000,000,000,000,000 배 증가했다는 것은 압축에 의해서 주변이 데워짐으로 원자들의 가능한 배열의 수가 그만큼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서 본 사무실의 가능한 배열의 수 보다 구상화시키기 더 어렵지만 관점은 동일한 것이다.
첫날에 휴지통은 책상의 오른쪽에 4평방 피트의 면적내의 어딘가에 있었다. 마지막날에는 그것이 사무실의 전공간인 100평방 피트의 어딘가에 있을 정도로 아주 많이 이동되었다. 그러면 사무실의 가능한 배열들의 수는 25배로 증가했다. 그리고 그 사무실 빌딩, 또는 (아주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전체우주의 가능한 배열들의 수도 그 만큼 증가했다. 우리는 악마에 의해서 만들어진 열이 먼 은하로 까지 확산되어 가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일단 데워졌던 실린더와 그 주변이 처음의 온도로 돌아간 다음 갇힌 분자를 제외한 우주의 원자들의 배열들의 수는 악마의 개입이 있기 이전의 그 온도에서의 그것보다 10,000,000,000,000,000,000,000배 만큼 더 크다.
악마는 분자의 위치에 관한 모든 지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피스톤을 아래로 밀면 분자의 압력은 한정없이 증가해 간다. 어느 압력에 오면 악마의 팔에 의한 압축은 불가능하며 수압 압축기나 다른 장치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압축은 더 진행될수록 더 많은 에너지 투입과 엔트로피 증대를 일으킨다. 결국 실린더가 녹아내리는 것을 막기위해서 냉각기가 요구된다. 지상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사용한다 해도 분자를 부피가 없는 이상적인 점으로 압축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악마가 할 수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주의 모든 이용가능한 에너지를 그의 수압압축기의 가동에 투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를 열에너지로 퇴화시킬 것이고 결과적으로 우주의 열적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다음 악마는 아무 것도 할 수없다.
그럼에도 악마는 분자의 수직위치에서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으며 오히려 우주의 최대 불확실 상태만을 만나게 될 뿐이다.
정보이론의 놀랄만한 귀결은 실험가가 계의 내에 있는 한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계에 대한 지식의 총량을 조금도 증가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어떤 부분에 관한 지식의 획득은 다른 부분에서의 똑같은 양의 지식을 상실함으로써 얻어진다. 지식의 획득은 기껏해야 무지가 이전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의 한계는 20세기 이전의 가장 회의적인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 우주를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지식은 전혀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망원경, 입자가속기, 전파망원경 등 어느 것도 우주안의 모든 입자들의 세세한 거동까지 알고자 했던 라플라스의 이상에 한치도 다가가게 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질라드와 브릴레온의 명제에 대한 이 설명이 잘못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일체의 것이 모두 가망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식의 진보는 정보와 유용한 지식간의 구분에 있다. 유용한 지식이란 누군가가 실제 관심을 갖고 있는 정보이다. 정보이론은 정보를 단지 추상적 양으로서만 취급한다.
캄캄한 방에서 의자를 찾기위해서 전등을 켠다. 정보이론은 의자의 위치에 관해서 얻은 정보는 그 대가로 전구와 주변 공기 속에 있는 원자들의 위치와 속도에 관한 정보들을 상실함으로써 상계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참이지만 당신이 의자를 찾을 때 원자에 대한 정보를 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불필요한 정보를 유용한 지식과 교환하는 것이 가능한한 아무런 문제도 없다. 과학은 우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의 탐구도 아니고, 또 탐구일 수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정보가 인간의 목적과 이해에 더 연관되는 것으로 선택되어지는 과정이다.
질라드와 브롤로인의 분석들 중 어느 것도 자연법칙들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쓸데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자연법칙은 참이라고 가정된 관찰된 사실들로 부터 관찰되지 않은 상황들로 추론해 가는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얻어진다. 적은 수의 관찰로 부터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것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물리학이 취해온 길이다